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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배도의 흐름이 성경이 기록한 짐승의 통치와 심판으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추적한다.
평화의 탈을 쓰고 다가오는 마지막 미혹의 정체
배도의 완성, 종교통합이 도달한 최종 종착역

오늘날 교회가 종교통합의 기치 아래 앞다투어 화합의 광장으로 나가는 현상은 거스를 수 없는 조류다. 평화와 공존의 수사가 강단을 점령한 사이 각 개인의 영혼은 이리들에게 사냥당하는 위기에 놓였다. 목자가 유일한 구원의 경계선을 허물고 이리와 손을 잡는 현장 위에서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혼란을 지나 무방비 상태다.
종교통합은 화합이라는 위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영적 포획의 실체다. 평화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지금이 가장 치명적인 배도의 시점이며 사냥당한 영혼의 마지막 종착역은 기록된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이제 1, 2, 3편의 논의를 종결하고 배도의 완성판인 짐승의 통치와 집행의 기록을 마주한다.
종말의 시계와 배도의 필연성
배도는 종결 상태에 진입했다. 단순히 방향을 틀어보는 시도를 종결짓고 이미 확정된 상태에 진입했다. 진리가 철회된 지점은 결코 공백으로 남지 않는다. 성경은 그 빈 지점에 반드시 다른 통치가 들어선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의 권위가 물러난 자리에 중립지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비워진 보좌는 곧장 다른 주인을 맞이한다. 배도는 신앙의 실패를 넘어 통치권이 이전된 사건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은 “저가 대적하는 자라 범상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칭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기록하며 짐승의 보좌 점유를 확증한다. 이 불법의 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오직 배도뿐이다. 진리를 판단 기준에서 끌어내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처소를 다른 권세가 합법적으로 점유하는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배도는 짐승을 초대하는 선언이며 통치의 문을 여는 열쇠다.
종교통합은 이 통치 질서가 실제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집행 장치다. 평화와 공존이라는 명분은 진리의 배타성을 제거하고 짐승의 규범을 유통하는 최적의 도구로 작동한다. 이 체제 안에서 신앙은 고백의 차원을 관통하여 생존을 걸고 치러야 할 시험으로 변모한다.
요한계시록의 구조적 배치는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물리적·경제적 압착을 예고하며 이는 배도의 완성이 가져올 필연적인 결과값이다. 짐승의 질서에 순응하는 행위는 하늘의 생명책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짐승의 명부에 소속을 확정하는 거래다. 배도의 궤적은 정지 상태를 종결짓고 이제부터 실체적인 통치로 작동한다.
배도, 짐승의 통치를 허가한 성경의 질서
사도 바울의 문장은 통치의 질서를 확정하는 선언이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데살로니가후서 2:3)라는 기록은 종말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단계를 종결짓고 통치가 세워지는 순서를 명시한다. 바울은 마음의 변질이나 신앙이 약해지는 문제를 논하는 단계를 넘어선다.
그는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할 사건을 ‘먼저’라는 단어로 확정하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 합법적으로 가능해지는 조건을 배도라는 사건으로 명시한다. 이 문장이 드러내는 실상은 명확하다. 배도는 종말의 과정 중 하나를 관통하여 짐승의 통치를 가동시키는 경계로 작동한다.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나오기에 앞서 배도가 공동체 내부에서 완료됨을 확증한다. 이는 통치의 주도권이 외부의 폭력을 넘어 내부의 자발적 이탈에서 비롯됨을 확정하는 기록이다.
바울은 곧이어 배도의 실체를 공간의 언어로 폭로한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데살로니가후서 2:4). 성경은 이 장면을 미래의 상징에서 분리하여 실체적인 기록으로 처리한다. ‘앉는다’는 동사는 주인이 앉을 곳이 이미 준비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 앉기 위해서는 비워진 곳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기록은 적그리스도의 오만을 묘사하는 문장을 종결짓고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결과를 명시한 판결문이다.
배도는 여기서 신학적인 실수의 단계를 관통하여 통치권이 넘어가는 사건으로 전환된다. 하나님의 성전은 권위가 머무는 곳이다. 그곳이 비워졌다는 실상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가 개인의 자리에서 다른 자에게 이전되며 그 자리가 곧바로 다른 통치에 의해 점유되는 질서를 선언한다. 배도는 주인의 권리가 다른 자에게 이전되는 결정적 사건이다.
이 질서 위에서 종교통합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다. 유일한 구원의 이름을 내려놓는 순간 교회는 스스로 성경적 저항권을 폐기한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선언을 포기한 공동체는 짐승의 통치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맞설 기준을 상실한다. 배도한 교회가 상납하는 종교적 권위는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폭력이 아닌 합의로 작동하게 만드는 자산이다.
성경은 이 과정을 윤리의 언어와 분리하여 통치가 세워지는 순서로 기록한다. 배도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집행이며 경배다. 짐승의 통치는 성경이 규정한 질서가 현실 위에서 실행되는 장면이다. 세계는 오래전에 기록된 문장이 실체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상태에 들어섰다.
시험과 불법에 빠진 자들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마태복음 24:10). 이 말씀은 배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드러나는 양상을 보여준다. 시험에 든 상태는 선택의 관문을 통과하여 이미 다른 궤도에 진입했음을 의미하며 진리의 기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점에 도달한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는 이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태복음 24:12)고 증언한다. 이 말씀은 변질된 신앙이 나아가는 방향을 선명히 드러낸다. 사랑의 변화는 단순한 감정의 기복을 넘어 종교통합의 흐름 안에서 신앙의 기준이 재배열되는 확실한 징후이다. 하나님을 향하던 신앙의 중심은 미혹으로 포장된 종교통합의 기준으로 온전히 교체된다.
진리 위에 서 있던 신앙이 흔들리면 배도의 흐름은 종교통합이라는 질서 안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미혹은 스스로 선택하고 수용한 확고한 기준이 된다. 세상이 제시하는 평화와 공존의 언어에 자신을 맡긴 이들은 유일한 구원의 이름을 붙드는 이들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궤도로 나아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통합은 신학적 논의를 넘어 관계와 신앙이 재배치되는 실제적인 선택의 장으로 기능한다. 성경은 이 과정을 관계의 변화와 기준의 이동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제시한다. 그 결과 배도 이후의 세계는 이미 구별된 질서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작동하고 있다.
매매의 권리를 장악한 통치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요한계시록 13:16–17). 이 기록은 통치가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는지 보여주는 확실한 기록이다.
성경은 짐승의 권력이 작동하는 곳을 우리 일상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지목한다. 먹고 사고 팔며 살아가는 치열한 현실, 곧 생존의 문턱에서 짐승의 통치는 실제로 집행된다. 본래 경배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고백이지만 짐승의 체제 안에서 매매는 경배를 짐승에게 바치게 만드는 강제적인 생존 조건이 된다.
계시는 모든 사람을 같은 통치 질서 위에 둔다. 작은 자와 큰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인과 종에게 표는 동일하게 적용되며, 이 방식은 생존을 조건으로 규칙의 이행을 요구한다. 표는 사람들을 하나의 체제 안으로 묶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짐승의 법은 전면적인 적용을 통해 통치의 권위를 형성한다.
배도가 완료된 환경 위에서 표는 통치 수단으로 가동된다. 성경은 '받게 한다'는 동사를 통해 피할 수 없는 강제가 일어나는 원리를 증언한다. 이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무섭게 생활 전체를 조여오는 강력한 통치 질서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통로가 하나로 묶였기에, 경배는 개인의 선택이 매양 생존을 위해 수용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바뀐다. 짐승의 통치는 총칼보다 시장의 질서를 먼저 장악하여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이 질서는 앞선 배도가 진리를 버리고 분별력을 잃어버린 결과물로서 현실에 등장한다. 매매를 통제하는 권력은 신앙의 자유를 직접 공격하기보다 삶을 이어갈 방법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군림한다. 성경은 이 전환을 ‘지혜’라는 단어로 확정한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요한계시록 13:18). 지혜는 실체적인 확인이다. 숫자는 적을 식별하는 명확한 단서다.
계시는 이 통치가 철저하게 작동함을 분명히 한다. 표를 거부한 자에게 가해지는 불이익은 즉각적인 처벌과 함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로 나타난다. 성경은 “못하게 하니라”는 짧은 문장으로 생존의 길이 막히는 현실을 선고한다. 이 간결한 기록은 통치의 잔혹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철저한 배제는 순응을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만든다.
세상의 통치가 우리 일상을 파고드는 지금, 교회의 배도는 그 체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 되고 있다. 오직 예수라는 구원의 이름을 놓치는 순간 세상의 권세에 맞설 영적 기준도 함께 사라진다. 하나님을 등진 배도는 결국 짐승의 표를 집행하는 수단이 되며 그 표를 받아야만 하는 거짓 논리를 만들어낸다. 이제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는 노골적인 강요를 넘어 '먹고사는 문제'라는 일상의 규칙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신앙의 저항이 사라진 자리에서 짐승의 통치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질서로 굳어진다.
성경은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이 체제가 가져올 마지막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린 양을 따라 어디로든지 가는 자들”(요한계시록 14:4)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은 자”(요한계시록 14:9)는 결코 삶을 일구어가는 같은 토양 위에 동시에 발을 딛고 살 수 없다. 짐승의 표는 자신이 복종하는 통치 주권을 증명하는 소속의 증표이며 성경은 매매를 위한 생존의 조건이 곧 짐승을 향한 경배의 고백과 하나로 묶여 있음을 명확히 기록한다.
짐승의 통치는 내부의 자발적인 승인과 일상을 파고든 규칙의 지배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매매를 장악하여 삶을 관리하는 권력은 모든 생존 활동을 짐승을 향한 경배의 과정으로 조직화한다. 계시는 이 통치 질서가 이미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지금 우리 곁에서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선포한다. 이제 신앙의 국면은 표를 선택하는 단계를 통과하여 이미 갈라진 영적 질서 속에서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삶으로 증명하는 이름의 실상만을 남겨두고 있다.

경배의 최종 분기와 최후의 판결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갈림길을 마음의 기분이나 의지의 문제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실체적인 기록으로 확정한다. 계시는 “또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4:1)고 기록하며 상황을 종결짓는다.
이 장면은 경배를 향한 뜨거운 열심을 묘사하는 단계를 넘어선다. 오직 무엇이 이마에 기록되었는가라는 단 하나의 명확한 기준으로 공동체의 운명을 가른다. 종말의 마지막 순간은 인간이 바치는 정성의 깊이를 관통하여 오직 내 이름이 어느 쪽 소속으로 기록되었는가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앞선 장에서 표는 생존의 조건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계시는 표의 겉모습을 최종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단계를 관통하여 더 깊은 실상을 폭로한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요한계시록 14:9–10). 여기서 심판의 기준은 경배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이다. 표는 통치에 육체의 생존을 위해 따른 결과로 그 순응이 증명하는 실체는 누구의 이름 아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소속의 확정이다.
성경은 이 분기를 윤리적인 선택을 다루는 드라마와 분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기록한다. 한쪽은 어린 양을 따르며 그 이름이 이마에 적힌 자들이고 다른 쪽은 짐승의 통치 아래서 표를 통해 삶을 이어가는 자들이다. 이 둘 사이의 중간 지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름은 나뉘어 기록되고 그 기록은 되돌릴 수 없는 판결로 남는다.
이 대목에서 생명책의 문제가 판결의 정면에 등장한다. 요한은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요한계시록 20:12)고 증언한다. 심판은 행위를 비교하는 일을 관통하여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선택의 과정을 넘어 누구의 이름 아래 귀속되었는가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짐승의 통치는 표로 삶을 관리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책으로 이름을 확인한다.
배도의 본질은 여기서 더욱 분명해진다. 배도는 잘못된 판단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다. 유일한 구원의 이름을 내려놓은 자는 자신의 이름이 어느 책에 기록될 것인지를 세상의 질서에 떠맡긴다. 성경은 이 위임의 결과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요한계시록 20:15)는 선포로 종결한다.
어린 양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 자들은 특별한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오직 이름의 고수에 집중한 이들이다. 계시는 그들을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요한계시록 14:4)라고 기록하며 소속을 확인한다. 그들의 차별성은 전략이나 지혜를 짜내는 일을 관통하여 이름의 유지에 머문다. 반대로 짐승의 통치에 속한 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표를 받았으며 그 결과 또한 동일하게 집행된다. 통치는 보편성을 제공했으나 심판은 개별적 소속을 회복시킨다.
이로써 4편의 흐름은 닫힌다. 배도는 자리를 비웠고, 짐승은 그 자리에 앉았으며, 통치는 삶을 압착했고, 마지막에는 이름이 갈라진다. 성경은 이 전 과정을 감정의 호소를 종결짓고 기록으로 밀어붙인다. 남은 실체는 어느 이름 아래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소속의 문제다. 종말의 마지막 문장은 선택을 권유하는 단계를 넘어, 이미 기록된 책을 펼쳐 보일 뿐이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최후의 판결
성경은 종말의 사건을 이미 발생한 사실로 기록한다. 배도는 하나님의 자리를 밀어낸 실제 사건이며 그 위에서 짐승의 통치가 가동된다. 하나님을 거부한 선택은 짐승 앞에 무릎 꿇는 경배로 이어진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가 짐승에게 옮겨진 순간 소속의 이전은 완료되며 경배의 이동이 곧 결과를 확정한다. 배도는 짐승의 통치를 스스로 불러들인 실제적 결과물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사건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 보여준다. 표와 매매는 경배의 소속을 드러내는 실체적 조건으로 이를 통해 짐승의 통치 아래 들어간 자들이 가려진다. 경배는 주권의 문제다. 다른 대상에게 경배가 옮겨진 자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통치 아래 놓이며 성경은 이를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기록한다.
마지막 심판 장면에서 요한은 하늘 보좌 앞에 펼쳐진 생명책과 그 기록대로 집행되는 판결을 목격하고 증언한다. “또 보니 죽은 자들이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요한계시록 20:12). 이름이 어디에 속하는가는 행위나 열심을 배제하고 오직 이름의 기록 여부라는 단 하나의 사실로 판결한다. 생명책에 적힌 이름은 변경의 여지를 종결한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포기하고 짐승 앞에 무릎 꿇은 배도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는 영원한 불못으로 직결된다.
성경은 이 모든 과정을 감정이나 해석 없이 사건의 순서와 집행으로 보여준다. 종말의 마지막 장면은 기록과 집행으로 완결한다. 배도가 완료된 바탕 위에서 통치는 삶을 압착하고 하나님을 밀어낸 선택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영원한 단절을 가져온다. 성경은 기록된 대로 심판을 실행하며 종말을 완성한다.
지금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종교통합은 이제 시대적 조류를 넘어 성경이 예고한 마지막 배도의 실체로 군림하고 있다. 평화라는 이름의 미혹 뒤에는 짐승의 엄중한 통치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 끝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린다. 예수가 경고하신 미혹의 홍수는 이미 시작되었고 바울이 예고한 배도의 사건은 우리 눈앞에서 실체적인 현실로 구현되고 있다. 1, 2, 3편을 거쳐 확인한 진리의 침식은 이제 짐승의 질서라는 거대한 함정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분명하다. 세상이 주는 기만적인 평강에 취해 배도의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비난과 소외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이름을 붙들고 생명의 길을 갈 것인지 지금 결정해야 한다. 짐승의 질서가 세상을 장악해 가는 지금 성도는 자신의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이 거대한 미혹의 홍수 속에서 건져낼 유일한 닻이며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허락된 구원의 소망이다.
종교통합이라는 배도의 완성판 앞에서 우리는 다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위에 서야 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가 사수해야 할 최후의 보루다. 짐승의 표와 경제적 압박이 삶을 위협할지라도 생명책에 기록된 자녀의 권세만이 이 배도의 시대를 관통하는 유일한 승전보다. 이제 미혹의 광장을 떠나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끝까지 사수하며 영원한 승리의 자리에 서는 자만이 그 이름을 보전할 것이다.
<필자 주>
이 글은 종교통합이라는 엄중한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예상보다 많은 부담과 집중을 요구받았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세밀하게 따라가며 기록을 이어가는 가운데, 이 주제가 다루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심한 영적 압박과 방해가 지속적으로 뒤따랐습니다.
치열한 영적 사투의 과정에서 쓴 글이다보니 문장이 다소 거칠게 느껴지거나 이해에 시간이 필요한 대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부분들은 기도하면서 점검하고 표현과 단어를 신중히 교정하며 정리해 나가겠습니다.
이 기록은 단순히 읽을거리가 되기보다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며, 성경의 깊은 의도를 숙고하게 하는 증언으로 남기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4편까지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또한 마지막 때를 분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소망을 믿음으로 굳게 붙드시면서, 마침내 주님을 대면하는 기쁨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성경: 개역한글판
데살로니가후서 2:3 (배도가 먼저 일어나야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종말의 순서)
데살로니가후서 2:4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통치하는 적그리스도의 보좌 점유)
마태복음 24:10 (배도 이후 시험에 빠진 공동체의 붕괴)
마태복음 24:12 (불법의 성함으로 식어버린 사랑의 실상)
요한계시록 13:16–17 (표를 통해 매매를 통제하는 짐승의 통치 방식)
요한계시록 13:18 (짐승의 수를 분별하라는 통치 식별의 기준)
요한계시록 14:1 (어린 양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 소속의 증표)
요한계시록 14:4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의 정체성)
요한계시록 14:9–10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선포된 심판)
요한계시록 20:12 (생명책을 기준으로 집행되는 최종 심판)
요한계시록 20:15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름의 최후)
📖 종교통합 시리즈 안내
- - 배도의 궤적과 실체: 종교통합 ① | 요나의 신앙 저널
- - 진리 변개와 교회 타락: 종교통합 ② | 요나의 신앙 저널
- - 기만적 평강과 음녀의 정체: 종교통합 ③ | 요나의 신앙 저널
- ▶ 배도의 완성, 그 종착역: 종교통합 ④ | 요나의 신앙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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