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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중심으로 짐짓죄의 본질을 살핀다. 연약함의 죄와 배교의 죄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진리를 거부하는 완악한 의지의 비극
히브리서가 규정하는 짐짓죄와 배교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죄 가운데 가장 혼란을 낳는 개념이 짐짓죄다. 많은 신자는 반복되는 연약함이나 신앙의 침체를 짐짓죄로 오해하며 두려움에 머문다. 성경, 특히 히브리서는 짐짓죄를 진리를 인식한 이후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배교의 문제로 다룬다. 이 글은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중심으로 짐짓죄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지 그리고 왜 회복의 질서가 작동하지 않는지를 구조적으로 살핀다.
진리를 거부하는 의지적 반역의 본질과 원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범하는 수많은 허물 가운데 그 뿌리가 가장 깊고 파괴적인 죄는 진리의 빛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짐짓죄다. 성경이 말하는 짐짓죄는 인간의 무지나 연약함에서 비롯된 실패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법도를 분명히 인식한 상태에서 자기 의지를 발동하여 선택되는 고의적 반역의 행위로 규정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죄의 본질을 파헤치며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브리서 10:26-27) 고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머리로 성경 지식을 습득한 수준을 넘어 성령의 조명 아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가치를 영혼 깊이 맛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그 모든 신령한 은혜를 발로 걷어차고 다시금 죄의 종노릇하기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짐짓죄에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구원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가진 단회성과 종말론적 성격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단 한 번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주셨다. 이 십자가 사건은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한 영원한 제사다.
그런데 이 제사의 효력을 경험하고도 다시 예수를 부인하며 세상을 선택하는 자를 구원하려면 예수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두 번 죽이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희생이었으나 이제 남은 역사의 시간은 심판주로 오실 재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미 단회적인 십자가 구원을 발로 짓밟고 배교의 길을 택한 자에게는 재림의 날에 임할 맹렬한 불의 심판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이 짐짓죄를 범한 자가 마주할 절망적인 진실이다.

구약과 신약의 역사에 나타난 짐짓죄의 실상
이러한 짐짓죄의 뿌리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걷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며 실수로 범한 죄에 대해서는 속죄의 길을 열어주셨으나 의도적으로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심판을 명하셨다. 민수기 기록을 보면 “본토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러한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민수기 15:30-31) 고 기록한다.
여기서 여호와를 훼방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의도적으로 모욕하고 그분의 창조주 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파괴하는 것과 같으며 단순히 법을 어기는 행위를 넘어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마음의 발로다. 짐짓죄가 발생하는 구체적인 기사를 살펴보면 발람 선지자의 행적을 빼놓을 수 없다. 발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고 분명히 명하셨으나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이 제시한 재물과 명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백히 알면서도 자기 마음속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범죄케 하는 계교를 가르쳐주었다. 이는 진리를 알고도 자기 유익을 위해 진리를 비튼 전형적인 짐짓죄의 모습이다. 베드로후서는 이를 두고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베드로후서 2:16) 고 기록했다. 짐짓죄는 이처럼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미친 자와 같이 멸망의 길로 달려가게 만든다.
히브리서 6장은 성도들이 가장 깊이 유념해야 할 짐짓죄의 명확한 규정을 담고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일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브리서 6:4-6).
여기서 타락한다는 것은 다른 이방 신을 섬기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부인하고 떠나는 완전한 배도를 뜻한다. 성령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가 예수를 버리는 행위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내 죄를 해결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세상 앞에 공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실 수 없으시다. 십자가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길을 스스로 떠난 자에게는 다시 돌아올 다른 문이 열려 있지 않다.
짐짓죄를 범하는 자들의 심리는 매우 완악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오히려 방종의 기회로 삼는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니 내가 무슨 죄를 지어도 결국은 받아주실 것이라는 교만한 확신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죄를 도모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들의 착각을 깨뜨린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브리서 10:29).
짐짓죄는 단순한 도덕적 결함의 차원을 넘어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는 행위로 드러나며 하나님의 아들이 흘린 보혈을 길가의 오물처럼 취급하는 영적 패륜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속죄하는 제사가 남아있지 않다. 이미 구원의 유일한 길인 십자가를 발로 밟아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오직 공의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
짐짓 죄의 비참한 사례는 가룟 유다의 최후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하나로 부름받아 주님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에서 접한 자다. 그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었으며 그 행위는 성경에 의해 배반으로 확정된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향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4)로 선언하신다. 이 말씀은 유다의 길이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자리로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짐짓 죄에 사로잡힌 자는 회개의 통로가 영구히 폐쇄된 상태에 놓인다. 이는 하나님이 돌이킴의 은총을 거두신 영적 고립의 자리다. 유다가 은을 도로 내놓은 행위는 생명과는 무관한 절망의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는 오직 사망을 향해 고정된 후회의 굴레 속에 갇혔다. 그는 결국 스스로 생을 끊는 종말에 이르며 짐짓 죄가 도달하는 끝이 영원한 심판임을 증명한다.
광야 생활 중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의 기사 또한 짐짓죄의 엄중함을 증명한다. 민수기 15장에 기록된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직후에 발생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끌어다가 모세와 아론 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 명하셨다”(민수기 15:35).
짐짓죄는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게 만드는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 전체의 거룩함을 잠식하는 전염성과 파괴력을 지닌다. 안식일의 규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것쯤은 괜찮으리라는 판단이 자리 잡고 하나님의 권위를 시험하려는 의지가 더해지며 짐짓죄의 형태가 드러난다.
짐짓죄는 또한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31-32).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다. 그런 성령의 조명을 받고도 의도적으로 거스르며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일로 치부하는 행위는 짐짓죄의 극치다. 이는 스스로 구원의 문을 닫아거는 행위이며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짓이다.
짐짓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멸시하는 자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4-5) 라고 꾸짖었다.
짐짓죄는 하나님의 기다림을 조롱하며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 마음에서 비축된다. 그 진노의 분량이 차오르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로마서 2:6-8).
짐짓죄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어디에 서는가
결국 짐짓죄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창조주의 주권을 정면으로 대적할 때 완성된다. 성경은 수많은 기사와 구절을 통해 짐짓 죄의 길로 들어서는 자들의 비참한 결말을 예고하며 우리에게 경고한다.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여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짐짓죄의 올무에 걸린 것이다. 우리는 다윗처럼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시편 19:12-13)라고 간절히 구해야 한다.
짐짓죄의 무서움을 직시하고 진리의 빛 아래 우리 자신을 부단히 복종시킬 때만이 영원한 심판의 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임을 기억하며 짐짓죄라는 파멸의 늪에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성경 개역한글
히브리서 6장, 10장
민수기 15장
마태복음 12장, 26장
로마서 2장
베드로후서 2장
시편 19편
📖 자범죄·고범죄·짐짓죄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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