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신앙 저널 | 말씀 속에서 시대를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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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은 하나님과 이어진 관계가 시간 속에서 맺은 성령의 열매다.


화평은 관계가 남긴 시간이다

성령이 맺게 하신 화평의 성경적 흐름
 

성령의 열매 화평 십자가로 이루어진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과 성경적 평화를 선포한다 요나의 신앙 저널

 
성경은 화평을 하나님과 함께 흐르는 시간의 기록으로 전한다. 창조에서 광야와 예언의 시간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화평은 관계가 이어지는 삶 속에서 확인된다. 성령의 열매로 기록된 화평은 시간이 흐르며 삶에 남고 그 남김이 신자의 삶을 이끈다. 이 글은 성경의 흐름을 따라 화평이 관계의 열매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핀다.
 

화평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여시는 창세기의 첫 장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반복된 찬사를 통해 화평의 원형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이 장엄한 선언 속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은 분리할 수 없는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빛과 어둠부터 땅의 모든 생명에 이르기까지 각기 고귀한 자리를 얻는다. 창조의 질서가 질서로 남는 그 현장에서 화평은 샬롬(שָׁلوֹם, 평강)이라는 생명력이 되어 살아 움직이며,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사실만으로 온전함의 근거는 견고하게 확립된다.

 

인간의 시원을 다루는 대목에 이르면, 흙으로 빚어진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가 스며드는 역동적인 결합이 묘사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거룩한 숨이 인간의 내면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삶은 창조주와 가장 밀접한 상태로 흐르게 된다. 화평은 이처럼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과 맞닿아 있는 본연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재한다.

 

평화로운 동산을 지나 창세기의 3장은 태초의 조화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비극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는 기록은, 두려움이 삶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걷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뒤바뀌었음을 증언한다. 역설적으로 화평은 이처럼 아름다운 동행이 사라지고 숨어버린 자리를 통해 그 존재의 소중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광야라는 척박한 시간 속에서도 화평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라는 가시적인 인도를 통해 그 맥을 이어간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이 전하듯 하나님은 백성들보다 앞서 가시며 여정을 이끄신다. 날마다 풍경이 바뀌고 길이 새롭게 열리는 이동의 연속이지만 그 걸음마다 하나님의 동행이 뚜렷하게 새겨진다. 화평은 하나님이 길을 닦으시며 함께 걷는 그 여정 속에서 고요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다.

 

제사를 마친 뒤 번제단 위로 내려오는 여호와의 불은 하나님의 임재가 공동체 안에 어떻게 확증되는지를 보여준다. 레위기 9장 24절의 이 초자연적인 신호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기쁘게 용납하셨다는 사실을 온 회중의 가슴에 각인시킨다. 화목 제사를 통해 백성은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은혜의 신비 안으로 진입하며 화평은 장황한 수식어보다 하나님 앞에 다시 선 그 감격스러운 장면 자체로 입증된다.

 

시편 23편에 흐르는 다윗의 수려한 고백은 신자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목자의 신실하심을 노래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되는 이 예찬은 목자의 인도 아래 놓인 삶이 누리는 풍성한 안식과 소생의 은혜를 투영한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여정 중에 만나는 구체적인 은총이며 샬롬은 이 여정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관통하여 흐르는 온전함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소망의 지평 끝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 곧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이 찬란하게 빛난다. 이 평강은 단순한 정서적 안정을 지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화목(εἰρήνη, 에이레네)으로 이어질 약속의 실체다. 예언서는 흩어진 역사를 통과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회복의 날을 대망하며 화평은 이제 약속의 이름을 얻어 역사의 실질적인 현실로 완성된다.

 

결국 성경의 도도한 서사를 관통하는 화평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쉼 없이 역동한다. 하나님과 호흡하는 일상, 그분을 향해 내딛는 모든 발걸음, 하나님이 앞서 가시는 여정 그 자체가 곧 화평의 현장이다. 동행의 흔적이 흐릿해질 때 삶에는 혼란이 기록되지만, 다시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돌릴 때 온전함은 회복된다. 화평은 추상적인 정의를 지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매 순간의 장면 속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성령의 열매 화평 십자가로 이루어진 평화는 성도의 삶 속에서 맺히는 화평의 열매와 복음 안에서의 신앙적 실제를 나타낸다 요나의 신앙 저널


소리의 한계 평화의 기만

예레미야 6장 14절은 곪아 터진 환부를 말로 덮으려 했던 한 시대의 타락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 기록 속에서 '평강'이라는 외침은 허공을 공허하게 가득 채울 뿐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여전히 고통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는 곧 말의 속도와 삶의 실체가 서로 비껴가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다. 샬롬(שָׁלוֹם)은 선언의 크기로 측정되기를 거부하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이어지는 삶의 깊이를 통해 그 진실함을 투영한다.

 

열왕기상 22장 12절은 전쟁의 광풍을 앞둔 왕의 궁정에서 울려 퍼지던 거짓된 확신의 목소리를 조명한다. “올라가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라는 수많은 외침은 오직 승리라는 욕망의 방향으로 쏠려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17절에서 미가야는 이 화려한 소음 너머의 진실을 목도한다 “내가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진 것을 보았나이다” 승리의 환호로 가득했던 궁정 내부와 달리 백성이 마주할 실제 시간은 흩어짐의 고통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성경은 이 이질적인 두 장면을 한데 배치하여 욕망을 담아 앞서가는 '말'과 그 뒤를 정직하게 따라가며 결과를 각인시키는 '시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시편 55편 21절은 타인의 내면을 넘어 우리 자신의 삶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는 언어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그의 입은 우유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말은 기름보다 부드러우나 그것은 뽑힌 칼이로다” 언어의 온도가 매끄럽고 따뜻할지라도 그 중심은 파괴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시인은 통찰한다. 이 고백은 언어의 표면에 머무는 기만적인 장식을 걷어내고 삶이 실제로 지향하는 본질적인 방향에 주목하게 한다. 참된 평강은 입술의 수식어가 아닌 삶의 중심에서 정직하게 증명되는 실재다.

 

이사야 48장 22절은 이러한 흐름을 한 문장으로 묶어 하나님의 엄중한 통치 원리를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느니라” 이 선언은 일시적인 감정 상태를 진단하는 지표를 통과하여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시간이 부재한 곳에 에이레네(εἰρήνη)가 안착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확증한다. 평강은 환경의 안락함이나 언어의 빈번한 노출을 통해 급조되는 결과물을 거부하며 오직 창조주와의 연합이라는 근원적인 토대 위에서만 그 실체를 형성한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거룩한 시간 속에서만 그 본질을 드러낸다.

 

에스겔 13장 10–11절은 무너져가는 실체를 가리려는 위태로운 시도를 시각적인 장면으로 묘사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붕괴하는 벽 위에 회반죽을 덧칠하며 평안이라는 얇은 외피를 씌운다. 그러나 폭풍우와 우박이 쏟아지는 시련의 때가 이르면 기만적인 덮개는 씻겨 내려가고 균열된 벽의 실체는 고스란히 폭로된다. “이 성벽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회반죽으로 바른 것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일시적인 위장이 결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낼 수 없음을 증언한다. 샬롬은 기만적인 장식 위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오직 진실한 삶의 궤적 위에서만 그 참된 형상을 비춘다.

 

잠언 14장 12절은 인생이 걷는 길의 비유를 통해 평강의 분별 기준을 명확히 제시한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길의 시작점은 결코 종착지의 풍경을 미리 보여주지 않으며 오직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결말이 선명해진다. 찰나의 판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성급함과 달리 하나님의 에메트(אֱמֶת, 신실함)는 장구한 세월을 통과하며 정직하게 증명된다. 평강은 주관적인 판단에 기대어 생성되는 일시적인 환상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 아래 서서히 영글어가는 견고한 열매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성경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를 소리의 크기나 군중의 합의로 측정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화려하게 등장한 언어의 시점과 삶이 그 시간을 통과한 뒤 남겨진 흔적을 입체적으로 대조하며 진정한 화평이 무엇인지 묻는다. 샬롬은 언어라는 모래 위에 세워지는 성벽이 아니다. 하나님과 긴밀히 이어지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빚어지며 에이레네로 이어져 성도의 삶에 뿌리 내린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는 화려한 언설을 뒤로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상의 진실함 속에서 그 본질을 서서히 드러낸다.

 

화평의 거처, 하나님의 얼굴

민수기 6장 24–26절은 제사장이 백성 위에 선포한 축복을 기록한다.“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축복은 정교한 순서를 따른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얼굴을 비추시고 마침내 얼굴을 향하신다. 그 거룩한 흐름 끝에서 평강이 주어진다. 평강은 홀로 존재하는 독립된 상태라기보다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계신 인격적인 시간의 절정에서 확인된다.
 
이때 사용된 평강은 샬롬(שָׁלוֹם, 온전함)이다. 샬롬은 단순히 외부 상황을 점검하거나 평가하는 지표를 넘어선다. 하나님이 얼굴을 향하고 계신 신실한 시간이 지속될 때, 그 시간 위에 겹쳐지는 온전함으로 실재한다. 민수기의 축복은 가시적인 삶의 조건을 열거하는 대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흐르는 영적인 관계에 집중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힘없이 유지될 때 샬롬이 선물처럼 수반됨을 성경은 분명히 기록한다.
 

사사기 6장 12절은 두려움에 떨던 기드온에게 임한 하나님의 강렬한 임재의 소리를 증언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이 선언은 이방의 압박이 극에 달해 모든 희망이 꺾인 고통스러운 현장 한가운데를 뚫고 울려 퍼진다. 기드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 명명한다(삿 6:24). 이 장면에서 샬롬은 모든 환경이 평안하게 정리된 먼 훗날의 보상이 아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확증된 그 긴박한 찰나에 동시에 터져 나온 영적 실재다. 화평은 복잡한 논증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임하신 시간 그 자체의 이름으로 가슴에 각인된다.

 

시편 29편 11절은 하나님의 통치가 가져오는 역동적인 힘과 평강의 조화를 찬양의 선율에 담아낸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권능으로 힘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시간과 그 궤적을 따라 흐르는 샬롬이 한 문장 안에서 긴밀히 공명한다. 화평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일하시는 통치의 현장과 언제나 정직하게 나란히 흐른다.

 

이사야 32장 17절은 화평의 서사를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맺히는 성숙한 결실의 언어로 승화시킨다. “의의 결과는 화평이요 의의 열매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여기서 '의'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지속되는 성도의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그 거룩한 분투가 일관되게 이어질 때 화평은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인 결말로 우리 곁에 남는다. 샬롬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해야 할 인위적인 목표를 지나 하나님 앞에 놓인 신앙의 시간이 무르익은 뒤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생명의 향기다.

 
이처럼 구약의 기록 속에서 화평은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나타난다. 샬롬은 성경의 문장 사이에 깊숙이 스며들어 전해진다. 부수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선포의 형식을 통해 그 본질을 강조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실한 시간이 멈추지 않고 계속될 때 하늘의 온전함은 조용히 성도의 삶에 뿌리 내려 확인된다.
 

예수가 세상에 남긴 평안

요한복음 14장 27절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밤을 기록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식탁이 놓여 있고 제자들은 곧 흩어질 길 앞에 서 있다. 예수는 다가올 고난의 장면을 이미 알고 계시며 그 긴박한 밤에 평안을 건넨다. 이 평안은 찰나의 위로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이 마주할 다음 장면으로 당당히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사용된 평안은 에이레네ἰρήνη, 화목에서 이어지는 평안)이다. 에이레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지속되는 구체적인 방식을 투영한다. 예수는 육신적인 떠남을 고하셨으나 그분이 주신 평안은 이별 이후의 시간까지 신실하게 연결된다. 동행의 형태가 가시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평안은 약속의 증표로 함께 전달된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는 또 다른 보배로운 약속을 전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곁에 머무는 분)로 기록된다. 예수의 떠남 이후 영원히 곁에 함께하시는 분이 제자들의 일상에 내주하신다. 이 약속은 평안이라는 열매와 나란히 배치된다. 참된 평안은 하나님의 동행이 다른 차원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시켜 준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는 다시금 확증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은 앞으로 필연적인 환난의 시간을 통과하게 된다. 그러나 그 거친 시간 속에서도 예수 안에 머무는 생명의 삶은 중단 없이 이어진다. 에이레네는 예수 안에 거하는 성도의 삶 속에서 실제적인 힘으로 부여되며 그 삶의 걸음을 견고하게 붙들어 준다.
 
십자가 사건 이후 이 평안은 더욱 승리감 넘치는 소리로 울려 퍼진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은 부활의 첫 장면을 생생히 전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움으로 문이 닫힌 방 안에서 제자들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마주한다. 이 인사는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 압도적인 평강을 선사한다. 에이레네는 부활의 첫 음성으로 기록되며 하나님과 다시 이어진 영원한 관계를 분명하게 입증한다.
 
로마서 5장 10–11절은 이 거룩한 흐름을 사도적 언어로 옮긴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여기서 화목은 카탈라게(καταλλαγή, 다시 이어짐)로 각인된다. 십자가는 단절되었던 관계가 다시 세워진 객관적 사건으로 영원히 남아 있으며 그 토대 위에 평안이 안착한다. 에이레네는 카탈라게라는 기초 위에서 신자의 삶이 나아갈 방향을 지탱한다.
 
예수가 남긴 평안은 일시적인 감정의 파동에 머물지 않는다. 십자가의 떠남과 부활의 영광, 그리고 성령의 신비로운 임재를 지나며 그 자리와 방식이 더욱 심화된다. 에이레네는 파라클레토스와 함께 제자들의 삶 구석구석에 깊이 스며든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이 신령한 관계는 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숨 쉬며 평안은 그 은혜의 자리에서 삶의 모든 시간을 소망으로 채운다.


감정을 넘어 화평의 관계로

로마서 5장 10절은 십자가 이후의 시간을 분명하게 기록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이 구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롭게 형성된 생명의 관계를 전한다. 십자가를 통해 카탈라게(καταλλαγή, 다시 이어짐)가 온전히 성취되고 그 신비로운 이어짐은 성도의 일상이라는 시간 속으로 도도히 흘러간다. 화평은 바로 이 은혜의 흐름과 함께 신자에게 전해진다.
 
로마서 8장 1절은 이 거룩한 관계가 삶의 현장에서 지속되는 양상을 선명하게 투영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경은 예수 안에 거하는 안전한 삶의 자리를 기록한다. 이 삶은 외부의 거센 풍파와 흔들리는 시간 속에서도 중단 없이 견고하게 이어진다. 화평은 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과 동행하며 모든 고난의 시간을 넉넉히 통과한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이 관계의 근원을 다시금 엄중히 밝힌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십자가 사건은 단지 과거의 기록된 역사로 박제되어 머무는 것이 한다. 피 흘림의 대속 이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화해의 길은 활짝 열려 있으며 그 관계는 오늘의 삶을 지탱하는 강력한 힘으로 존재한다. 화평은 십자가의 고통 위에서 잉태되어 성도의 구체적인 삶 구석구석으로 깊이 스며든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이 화평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으로 기록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예수는 화평에 대한 이론을 설파하는 스승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화평의 실체로서 우리 곁에 현존하신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연합하여 살아가는 삶 속에서 화평은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관계의 이름으로 각인된다.
 
빌립보서 4장 7절은 이 관계의 영향력이 내밀한 마음과 생각의 영역까지 확장되는 과정을 전한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평강은 에이레네ἰρήνη, 화목에서 이어지는 평안)로 기록된다. 하나님과 다시 이어진 생명의 관계가 삶의 가장 깊은 안쪽까지 촘촘히 감싸며 흐른다. 성도의 마음과 생각은 이 거룩한 평강의 흐름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성경은 화평을 추상적인 이론이나 짧은 설명으로 남기는 법이 한다. 하나님과 다시 연결된 화목한 관계가 실제 삶의 자리로 옮겨지고 그 관계가 생애 끝까지 신실하게 유지되는 역동적인 장면을 기록한다. 카탈라게라는 기초 위에 놓인 에이레네는 삶의 종착지까지 성도와 끝까지 동행한다. 하나님과 다시 맞닿은 은혜의 시간이 영원히 살아 있고 그 거룩한 머무름이 화평이라는 열매로 분명하게 확인된다.
 
참고문헌
성경 개역개정
팀 켈러(Tim Keller), 「  신을 위한 갈라디아서 」
이상규, 「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 」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H. Wright), 「  성령의 열매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  그리스도를 본받아 」

📖 성령의 열매 시리즈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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