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신 기도는 신앙의 기준이며 사도신경보다 앞서는 성경적 원칙이다. 신앙의 중심을 다시 말씀과 기도에 두어야 한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신앙의 첫 기준이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신경보다 앞선 예수의 명령
![[사도신경, 신앙 고백의 명확한 실체]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핵심 고백을 시각적으로 배열하여 신앙의 정수를 선포한다.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성도의 실제를 나타낸다. 요나의 신앙 저널](https://blog.kakaocdn.net/dna/MSwnS/dJMcacO2xfs/AAAAAAAAAAAAAAAAAAAAAGipbIIiSvKCwuj0nK0-se7uv-zunywwW9STV7IpehcS/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802395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qstjLrPZI0FpaPp6QBhr%2BqRE9gE%3D)
오늘 한국 교회는 사도신경을 예배의 기본 질서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하다.
어떤 교회는 사도신경을 하지 않으면 정통성 부족 혹은 이단성까지 의심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성경의 흐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초대 교회는 신앙을 특정한 문구로 요약하여 고백하기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친 기도의 방식을 신앙의 첫 기준으로 삼았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신앙 전체를 정리하는 실제적 구조였고, 예배의 가장 중심적 자리였다. 그렇기에 사도신경을 예배 필수 요소로 규정하는 현상은 성경적 근거보다 후대 전통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남기신 첫 기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많은 가르침 가운데 신앙이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태복음 6:9)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프로세우헤스타이(προσεύχεσθε)는 선택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라 따라야 하는 명령형으로 기록되었다.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만든 설명이나 정리된 문장이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알려 주신 기도의 자리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무엇을 외우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기도를 통해 보여 주셨다. 이 기도 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용서와 보호와 구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제자들은 이 기도를 들으며 자신들의 마음과 삶을 다시 세워 갔다. 정리된 신조나 교리 체계가 없던 시기였지만 예수의 말씀과 기도는 그들이 믿음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교회가 신앙의 기준을 세우려 할 때 되돌아가야 할 자리는 분명하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그 기도 자체다. 이 출발점을 놓치면 신앙은 점점 전통과 형식 속으로 옮겨 가고 예수의 가르침은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주님이 남기신 기도는 신앙을 다시 시작하는 기준이며 교회가 세대를 지나며 붙잡아야 할 지향점이다.
초대 교회는 신조보다 기도를 먼저 세웠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단순했다.
말씀을 낭독하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 예배 방식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있었으며 신앙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문장을 만드는 일보다 예수께서 남기신 기도를 실천하는 것을 중요한 기초로 삼았다.
이 시기의 교회는 특정 신조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신앙의 내용을 확인하는 방식은 고백문 암송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기도를 따라 살아가는 실천이었다. 제자 시대와 가까운 공동체일수록 이 흐름은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예수의 기도를 중심에 두고 신앙을 세웠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도신경은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는가.
AD 90년에서 120년 사이에 작성된 열두 사도의 가르침(Didachē, Διδαχή: , 디다케)는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다. 디다케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세대가 남긴 실천 지침이며, 예배와 세례와 성찬과 기도 생활을 매우 현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 안에는 사도신경이나 특정 신조를 예배의 필수 요소로 삼았다는 흔적이 없다.
오히려 디다케는 “너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하루 세 번 드려라”고 기록했다.
초대 교회가 무엇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았는지가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기도를 반복하며 예배와 공동체와 삶을 세웠고 그 기도는 신앙의 중심을 지키는 기준으로 자리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은 고백문을 통해 확인되지 않았다.
예수가 가르치신 기도가 성도들의 마음을 이끌었고 공동체의 예배를 형성했다. 이 흐름은 사도신경이 형성되기 오래전부터 교회가 이미 신앙의 중심을 기도로 세워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의 교회는 종종 사도신경을 신앙의 기준처럼 생각하지만 초대 교회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다. 초대 교회가 붙든 기준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도였고 그 중심에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있었다. 예배의 출발점이 예수의 명령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교회가 처음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분명하게 알려 준다.
사도신경의 형성과 위치: 기준이 될 수 없는 이유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은 많은 오해를 불러왔다.
열두 사도가 함께 문장을 구성하여 기록한 문서라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사도신경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장 초기 형태는 로마 교회에서 세례 교육에 사용되던 간단한 신앙 문답으로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지역 교회에서 사용되던 고백문이 조금씩 합쳐지고 정리되며 오늘날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은 2세기에서 4세기까지 이어졌고 중세 교회는 이 고백문을 예배와 교리 교육 안에 깊이 포함시키며 지금과 같은 전통으로 굳어지게 했다.
이 전래 과정에서 의미가 확장되기도 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 같은 표현은 원래 교회의 공동체적 속성을 말하는 단순한 고백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적 교회와 성인의 공덕 개념과 연결되었고 연옥과 같은 신학적 요소가 덧붙여지기도 했다. 이 변화는 사도신경의 원래 의도가 흐려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고 성경이 말하는 의미와 거리가 생기게 했다.
사도신경은 신앙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는 유익한 전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배의 필수 규범으로 삼기에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사도신경은 사람이 정리한 신앙 고백문이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주신 가르침과 기도는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명확한 기준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신앙의 정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태도는 전통이 말씀의 자리를 대신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사도신경은 존중할 가치가 있는 신앙 유산이지만 신앙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신앙의 중심은 예수가 남기신 가르침과 기도에서 시작된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신앙과 삶을 재구성하는 방식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암송을 위한 문장이 아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치신 이 기도는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틀이며 하나님과 성도가 어떤 관계 안에서 서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기도는 예배의 한 요소가 아니라 신앙 전체를 다시 세우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기도의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호칭을 넘어서 성도의 정체성과 하나님 나라의 위치를 선명하게 한다.
헬라어 표현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는 하나님이 모든 현실 위에서 주권을 가지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예수께서는 신자가 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서도록 가르치셨다. 이 고백 속에서 신앙은 단순한 감정이나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 통치 아래에 놓인 삶이라는 방향을 갖추게 된다.
이어지는 간구들은 삶의 실제 영역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성도의 목표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일임을 보여준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간구는 사람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존재가 아니며 매일의 필요와 생존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기도는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제로 나타나야 함을 말한다. 용서와 화해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삶의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며 보호와 인도하심이 없이는 서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한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성도의 신앙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르침이다. 이 기도 안에서 신앙은 마음속 확신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 속에서 신자는 믿음을 붙들고 열매를 맺도록 이끌림을 받는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하셨고 초대 교회는 이 기도를 예배와 공동체의 중심에 두었다. 이 기도는 인간이 정리한 고백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주신 계시적 기도이며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는 본래적 기준이다.
![[사도신경, 신앙 고백의 명확한 실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고백들을 시각적으로 정리하여 진리의 선명함을 선포한다. 흔들림 없는 신앙의 근거를 나타낸다. 요나의 신앙 저널](https://blog.kakaocdn.net/dna/v8XFl/dJMcabCA7TB/AAAAAAAAAAAAAAAAAAAAAJxLDUwEQkpg-yyWKlBypC1jg0jTmBdKp6d2lIg3oYaN/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802395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kHO8iu%2B456zeBGSEpojZ%2BwidTvM%3D)
신조보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선한다는 성경적 원칙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도록 가르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 지적하신 것은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려는 태도였다. 이 원리는 오늘의 신앙 전통과 신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조는 신앙의 요점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신조가 말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 시작하면 순서가 뒤바뀐다. 기준은 언제나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증언이며 신조는 그 기준을 이해하도록 돕는 보조일 뿐이다.
예수의 가르침, 특히 주님의 기도는 신조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신자가 어떤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삶의 언어로 보여준다.
반면 신조는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는 문장이다. 둘은 함께 사용될 수 있지만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먼저 말씀이 기준이 되고, 전통은 그 기준을 따라 사용된다. 신앙의 근거를 성경이 아니라 관습과 오랜 고백에 두기 시작하면 중심은 서서히 이동하게 된다. 이 지점은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교회도, 사용하지 않는 교회도 함께 점검해야 할 부분이다. 신앙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되묻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교회가 무엇을 관습으로 지켜 왔는가’가 아니라 ‘예수께서 무엇을 명하셨는가’이다. 신조는 남길 수도 있고 수정할 수도 있지만, 예수의 말씀은 그렇게 다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신조보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선한다는 원칙은 선택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기본 질서다. 이 질서를 분명히 할 때 교회는 전통을 올바르게 사용하면서도 전통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회복하게 된다.
사도신경 미사용을 이단 기준으로 삼을 수 없는 이유
오늘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모습이 익숙하게 자리 잡았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 교회를 향해 본능적인 낯섦이나 의심을 느끼는 경우도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사도신경을 하지 않으면 정통이 아닌 것 같다”거나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면 이단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관행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
신앙의 중심은 특정 시대의 예배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드러내신 진리다. 사도신경은 교회가 오랜 세월동안 정리해 온 신앙의 요약일 수 있지만 그 형식이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는다. 교회가 사도신경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기준은 언제나 성경의 증언에 있어야 한다. 신앙은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통해 분별된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동방교회 전통은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중심으로 고백해 왔다. 개혁교회 전통 역시 사도신경을 예배의 필수 요소로 다루지 않았고 교육이나 세례와 같은 특정한 상황에서 선택적으로 사용하였다. 복음주의 교회들 가운데는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말씀에 충실한 신앙을 지켜 온 공동체가 적지 않다.
교회 역사 어디에서도 ‘사도신경 미사용은 이단’이라는 기준이 세워진 적이 없다.
참된 교회의 기준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복음의 본질, 그리고 성경을 향한 태도에 있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이 교회가 사도신경을 사용하는가를 묻기보다 이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도 복음을 흐릴 수 있고,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말씀에 견고히 서 있는 교회가 있을 수 있다.
사도신경 사용 여부가 정통성과 이단성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사도신경 미사용을 곧바로 이단의 징후로 보는 시각은 성경 중심이 아니라 전통 중심의 시각에 가깝다. 신앙의 기준은 사람이 만든 고백문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의 증언에 두어야 한다.
신앙의 중심을 다시 예수의 명령으로 돌려야 하는 이유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전통과 예배 형식을 쌓아 왔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지만 전통이 쌓이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예수의 가르침보다 전통이 더 익숙하고 중요하게 느껴지는 일이 생긴다. 이 지점에서 신앙의 중심이 흐려지고 기준이 옮겨 가기 시작한다.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일은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백이 예수의 말씀과 주님의 기도를 가리는 자리까지 나아간다면 순서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 신앙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의 명령과 복음에 있어야 하며 그 중심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이 바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의 기준을 다시 예수의 명령으로 맞춘다는 것은 단순히 예배 형식을 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어떤 잣대로 신앙을 점검할 것인지, 그 중심을 새롭게 세우는 일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신자가 어떤 관계 속에 서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는지를 삶의 언어로 보여준다. 이 기도는 교리가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방향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기도에 자신을 비추는 자리로 돌아갈 때 신앙은 형식과 절차를 넘어 실제 삶을 이끄는 힘을 드러낸다. 기도는 정해진 문장을 낭독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응답하는 시간이 된다. 이렇게 신앙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일은 교회가 잃어버린 본래의 방향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결국 이 글이 다루는 핵심은 사도신경의 사용 여부가 아니다. 교회가 어떤 기준 위에서 서 있는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중심에 놓이고 주님의 기도가 예배와 일상의 깊은 곳에서 다시 울리기 시작할 때 교회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 전통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신앙의 중심이 예수께로 모아질 때, 그분이 가르치신 기도는 교회의 고백이 되고 성도의 삶을 이끄는 방향이 된다.
주님의 기도로 돌아가는 신앙의 기준
사도신경은 교회가 세월 속에서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기 위해 만든 전통적 고백문이다.
교육의 도구로는 유익하지만 예수께서 직접 남기신 가르침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사도신경이 예배와 신앙 교육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그 형성 과정에는 시대의 흐름과 후대의 신학 정리가 함께 더해졌다.
신조는 성경의 명령을 그대로 옮긴 문서가 아니라 교회가 신앙을 정리하며 세대를 거쳐 남긴 결과물이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제자들에게 직접 주신 말씀이다. 이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신자의 정체성, 삶의 우선순위, 죄와 용서, 공동체의 삶, 보호와 인도까지 신앙을 이루는 핵심이 모두 담겨 있다. 초대 교회가 신앙을 세울 때 이 기도를 중심에 두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고백문을 먼저 만들지 않았고 예수의 명령을 반복하며 신앙의 방향을 확인했다.
오늘 교회가 다시 붙들어야 할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도 예배를 세우는 원리도 예수께서 남기신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사도신경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고백이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기준은 언제나 예수께서 직접 주신 명령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 말씀은 신앙의 출발점이며 예배의 기준이며 교회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중심에 놓일 때 신앙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말씀 안에서 다시 세워진다.
참고문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Zondervan
John Stott, Basic Christianity, IVP
Alister McGrath,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Wiley-Blackwell
J. I. Packer, Knowing God, IVP
평신도를 위한 조직신학, 김세윤, 두란노
Credo: 사도신경 강해, 팀 켈러, 두란노
사도신경 해설, 박영선, 남포교회 출판부
Apostles’ Creed,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CCEL)
The Apostles’ Creed Commentary, Philip Schaff, Christian Literature Co.
※ 본 ‘요나의 시선’의 모든 글과 이미지는 무단 복제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성경의 권위와 해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부, 모든 생명의 근원 창조주 하나님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1.28 |
|---|---|
| 삼위일체, 삼위의 영원한 한 분 하나님 | 요나의 신앙 저널 (1) | 2025.11.27 |
| 창세기 인류 수명, 역사적 사실인가?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1.19 |
| 창세기 6장 노아 홍수, 역사적 진실과 기록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1.18 |
| 창세기 1장 6-8절, 궁창 위의 물과 실제 창조 사건 | 요나의 신앙 저널 (1) | 202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