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린도전서 13장을 중심으로 은사 종료론의 전제와 성경이 제시하는 시간표를 점검한다.
은사 종료론의 전제와 성경의 시간표
‘온전한 것’과 ‘대면’은 언제를 가리키는가

은사 종료론은 교회의 혼란을 막고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린도전서 13장이 제시하는 시간표를 특정 시점에 고정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흐름을 단순화한다. 이 글은 은사 종료론이 붙잡고 있는 핵심 전제를 정리하고 성경이 말하는 ‘지금’과 ‘그때’의 구분을 본문 자체의 문맥 안에서 따라간다.
은사 종료론은 왜 등장하게 되었는가
은사 종료론, 즉 교회 안에서 “은사는 끝났다”는 주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주장이 아니다.
이 말은 교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신앙을 수호하려는 의도 속에서 오랜 기간 형성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거짓 예언이나 왜곡된 영적 체험으로 인해 반복적인 상처를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성경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려는 흐름이 강력해졌다. 은사 종료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눈에 보이는 은사 현상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상황을 목격하고 성경의 가르침보다 개인의 체험이 앞서는 상황을 강력히 경계하는 마음이 이 주장의 근간을 이룬다. 은사가 계속 주장되는 상황에서는 누가 참된 성령의 역사이고 누가 거짓인지 분별하기 어려워졌고 그 결과 “오직 성경만 붙들자”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특정 시대 구분과 연결되었다.
사도들이 직접 복음을 증언하고 교회를 세우던 시기에는 특별한 표적과 능력이 당연히 동반되었다고 이해된다. 이후 사도 시대가 역사 속에서 종결되면서 그 특별한 역할 또한 함께 마무리되었다는 인식이 확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은사는 초대 교회를 위한 한시적인 도구였으며 이후의 시대에는 그 역할이 완료되었다는 생각이 형성되었다.
이 주장은 실제 교회 현장에서 큰 힘을 얻었다.
성경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은사는 끝났다”는 선언은 명확하고 안전한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을 붙잡아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별력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교회를 향한 진지한 고민과 책임감 속에서 형성되었다.
은사 종료론은 교회의 혼란을 방지하고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 출발점을 정확히 살피는 것이 이후 논의를 바르게 진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은사 종료론이 주장하는 핵심 논리는 정확히 무엇인가. 다음 소제목에서는 이 주장을 구성하는 논리를 하나씩 정리한다.
종료론이 붙잡고 있는 핵심 논리는 무엇인가
은사 종료론은 고린도전서 13장 8절부터 10절의 본문을 그 중심에 둔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이 본문은, 은사가 어떤 특정 시점에 역할을 마치고 사라지는 구조를 전제하게 만든다.
종료론의 논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논리의 핵심은 명확한 대비다. 바울이 언급한 “부분적으로”와 “온전한 것”은 시간의 구분으로 읽힌다. 즉 지금은 부분의 시간이며, 온전한 것이 도래하면 은사는 그 기능을 종결한다는 구조다. 이 해석 안에서 은사는 교회의 미성숙한 시기에 필요했던 한시적 도구로 위치를 고정한다.
복음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고 교회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표적과 능력이 필요했지만 그 역할이 완료되면 은사도 함께 물러난다는 이해다. 이때 “온전한 것”은 성경 정경의 완성으로 해석되어 왔다.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가 추가되지 않고 말씀이 문서로 고정되었으며 교회가 그 말씀 위에 굳건히 서게 되었으니 추가적인 표적과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구조는 은사를 말씀 이전의 보조 수단으로 규정하고 말씀을 은사를 능가하는 최종 기준으로 삼는다.
이 논리는 자연스럽게 시대적 구분으로 확장된다. 사도들이 직접 복음을 증언하던 시기가 은사가 가장 활발히 나타난 특별한 시기였고 사도 시대가 지나가면서 그 역할도 함께 종결되었다는 이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표적과 능력은 초대 교회를 세우기 위한 한시적 도구로 해석되며 오늘의 교회는 그 시기를 지나 말씀 중심의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렇게 정리된 논리는 분명한 강점을 갖는다. 성경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강조하고 개인의 체험이 말씀 위에 군림하는 상황을 강력히 경계한다.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세워주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 논리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설득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 논리는 한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정말로 성경 문서의 완성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지금”과 “그때”라는 대비가 실제로 시대의 구분을 뜻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종료론의 논리는 이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전개된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성경은 과연 이 본문에서 시대를 나누고 있는가. 바울은 은사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가.
다음 소제목에서는 이 질문을 가지고 성경 본문 자체가 제시하는 시간표를 직접 따라가 볼 것이다.
성경은 여기서 시대를 나누는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은사의 변화에 대해 말하지만, 그 변화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지금”과 “그때”를 대비하지만, 그 기준을 역사적 연대의 구분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바울이 제시하는 대비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상태의 질적인 차이에 집중한다.
본문은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는 선언을 포함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는 상태이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9)라는 문장은 교회의 현재 상태를 규정한다. 이 현재는 미성숙의 문제가 아닌 구속사적 진행 중인 상태다. 바울은 이 상태를 교회의 정상적인 '지금'으로 설정하고 말한다.
그는 이 ‘지금’을 이미 지나간 시기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대비는 “그때”이다. 바울은 이 전환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활용한다.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거울로 보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비유들은 모두 한 시기가 종결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한 상태가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전환의 순간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전환을 문서의 완성이나 제도의 정착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특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다”는 표현은 시간 구분의 언어 대신 관계의 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이 말은 간접적 인식이 끝나고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장면을 교회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 분명히 “그때” 도래할 일로 제시한다. 이러한 대비는 사도행전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특정 시기에 가두지 않는다.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며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 2:17)라는 선언은 성령 사역의 시작을 선포할 뿐 그 종료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은사의 사역이 특정 시점에서 멈춘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 또한 같은 방향을 가진다.
그는 은사를 현재형의 문제로 다룬다. “너희가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는 권면은 은사가 이미 종료된 기능이라면 성립할 수 없다. 바울은 은사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사용의 질서와 목적을 다룬다.
이 본문들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 흐름이 드러난다.
성경은 은사의 변화를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때라는 하나의 장면으로 확정한다. 바울은 이 전환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온전한 것”은 교회가 이미 지나온 시점을 가리키지 않는다. 성경은 은사의 변화를 과거의 일로 밀어 넣지 않는다.
은사는 여전히 ‘지금’의 시간, 곧 아직 부분적으로 알고 대면하지 못한 상태 속에서 교회를 섬기는 선물로 놓여 있다.
이제 질문은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 속에 서 있는가 하는 문제다. 다음 소제목에서는 바울이 이 시간표 안에서 믿음과 소망 사랑을 어떻게 배치하는지를 살핀다.
성경은 은사를 어떤 성격의 선물로 말하는가
성경은 은사를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 가운데 나누어 주시는 선물로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고 말한다. 이 문장은 은사의 목적을 분명히 확정한다.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성령께서 나누어 주시는 사역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은사라는 말은 그 단어 자체에 이미 방향이 담겨 있다. 은사(χάρισμα , 카리스마, 은혜로 주어진 선물)는 인간의 공로나 성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거저 주어진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은사를 인간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나누어 주시는 선물로 확고히 위치시킨다.
이 이해는 사도행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며 그 일을 새로운 체험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의미를 정립한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 2:17)라는 선언은 성령의 역사가 특정 계층이나 한 세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성경은 은사를 사도 개인의 표지로 제한하지 않고 교회 전체를 향한 성령의 부어 주심으로 말한다.
중요한 점은, 이 흐름 어디에서도 은사가 말씀과 대립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은사를 말씀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시로 제시하는 대신 이미 주어진 말씀의 약속이 성령의 역사로 공동체 안에 드러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은사는 말씀의 위치를 대신하지 않으며, 오히려 말씀의 권위를 증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바울은 이 선물을 교회의 현재와 직접 연결한다. 그는 은사를 제거하거나 과거의 일로 밀어 넣지 않는다. 고린도교회의 혼란 속에서도 바울의 태도는 명확하다. 그는 은사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사용의 방향과 질서를 다룬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는 권면은 은사가 여전히 교회의 삶 속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전제한다.
이 모든 본문을 종합하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성경은 은사를 특정 시대의 필요가 다하면 함께 끝나는 장치로 설명하는 대신,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누어 주시는 선물로 다룬다. 이 선물은 교회의 상태 곧 아직 부분적으로 알고 대면하지 못한 시간 속에서 기능한다. 은사의 성격은 성경이 제시한 시간표 안에서 규정된다. 은사는 이 시간표 속에서 교회를 섬기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시간표는 여전히 ‘지금’의 시간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의 변화를 어떤 방향으로 말하는가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을 나열한 뒤 그것들이 “폐하고” “그친다”고 말한다 (고전 13:8). 그러나 이 변화는 은사가 가치를 잃는다는 선언에 해당하지 않는다. 바울은 은사가 수행하던 기능이 새로운 상태로 이행되는 전환의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이 변화의 기준을 시간의 길이나 제도의 완성에 두지 않는다.
바울이 제시하는 기준은 “지금”과 “그때”의 대비이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9)라는 말은 교회의 현재 상태를 명확히 규정한다. 이 현재는 진행 중인 상태이며, 은사는 바로 이 ‘지금’의 시간 속에서 기능한다. 바울은 이 상태를 교회의 현재로 설정한다. 이 대비는 비유로 강화된다.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거울로 보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장면은 모두 상태가 전환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이 비유들은 문서가 완성되는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인식의 방식이 달라지는 장면과 관계가 바뀌는 지점을 그린다.
그는 이 전환을 교회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고 분명히 “그때” 도래할 일로 설정한다. 특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다”는 표현은 강력한 관계 언어이다. 이 말은 간접적 인식이 끝나고 직접적인 만남이 시작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장면을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점으로 제시한다.
그는 이 대면을 성경 문서의 완성 시점과 연결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변화의 방향은 분명하다. 은사의 변화는 기록의 완성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기준은 오직 주님과의 '대면'이다. 바울은 은사가 종료될 시점을 시간의 연대표로 제시하지 않고 관계의 완성이라는 하나의 장면으로 확정하며 이 장면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이 전제 위에서 은사는 여전히 교회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바울은 은사를 교회의 ‘현재’와 어떻게 연결하는가
바울은 은사를 지나간 시대의 흔적이 아닌 교회의 현재가 다루어야 할 문제로 바라본다.
그는 은사를 과거의 흔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고린도교회의 혼란 앞에서도 바울은 은사를 제거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사용의 질서와 목적을 다룬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는 권면은 은사가 지금 지속되고 있음을 전제한다.
문제는 은사의 존재 여부 대신 사용의 바른 방향에 있다.
바울은 방향을 제시한다.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이 전제는 은사가 이미 기능을 마친 상태에서 성립될 수 없는 명제다. 바울은 은사를 현재형으로 다룬다. 그의 명령과 권면은 모두 ‘지금’의 교회를 향한다. 에베소서에서도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
바울은 교회를 이미 완성된 공동체로 부르는 대신, 성장하고 있는 몸으로 말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여기서 ‘온전하게’라는 말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은사는 바로 이 성장의 과정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현재성은 바울의 시간표와 맞물린다. 바울은 믿음과 소망이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시간 속에 교회가 놓여 있음을 전제한다.
아직 보지 못했기에 믿음이 필요하고, 아직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소망이 필요하다.
은사는 바로 이 시간 안에서 교회를 돕는 선물로 기능한다. 바울에게 은사는 ‘지금’의 교회를 섬기는 성령의 나눔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제시한 변화의 기준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이상 바울은 은사를 현재형으로 다룬다. 그의 관심은 은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며 은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온전한 것’과 ‘대면’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은사의 변화를 설명하며 “온전한 것”과 “대면”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의도적으로 결합한다.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주제를 설명하는 대신 바울의 논리 안에서 하나의 장면을 향해 수렴한다. 은사의 변화 시점은 바로 이 두 표현이 가리키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온전한 것”(τὸ τέλειον, 텔레이온, 완성된 상태)은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텔레이온은 목적에 이른 상태, 과정이 끝나고 궁극적인 도달점에 이른 지점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온전함을 교회의 현재로 두지 않고 미래에 도래할 상태로 설정한다.
바울의 문맥에서 이 온전함은 비유를 통해 명확히 규정된다.
그는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의 대비를 제시하며 그 차이를 상태의 전환으로 드러낸다. 어린아이는 성장의 과정에 있는 존재다. 바울은 교회를 이 성장의 과정에 둔다. 은사는 이 과정 속에서 교회를 섬기는 선물로 배치된다.
이 전환은 다음 문장에서 분명해진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고전 13:12)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온전함의 기준을 더 이상 추상적으로 두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장면 즉 ‘대면’으로 제시한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다’는 표현은 (πρόσωπον πρὸς πρόσωπον, 프로소폰 프로스 프로소폰, 직접 대면)이라는 강력한 관계 언어이다.
이 표현은 간접적 인식이 끝나고 직접적인 만남이 시작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대면'의 상태를 교회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일관되게 “그때”의 일로 설정한다. 바울은 여기서 두 표현을 하나의 기준으로 묶는다. “온전한 것”은 어떤 추상적인 완성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곧 “대면”의 상태인 것이다. 이는 문서가 완성되거나 교리 체계가 정리되는 시점을 가리키지 않는다.
바울은 은사의 변화를 지식의 충분성 대신 관계의 완성으로 설명한다.
이 해석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전체 구조와도 일치한다. 바울은 지식과 예언과 방언을 모두 ‘부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부분성의 종착점을 ‘대면’으로 제시한다. 만약 "온전한 것"이 성경 정경의 완성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바울이 제시한 비유들은 그 설명력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나 “온전한 것”을 대면의 상태로 읽을 때, 문맥은 가장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은사의 변화는 문서적 완성에 연결되지 않고 오직 '대면'을 그 기준으로 삼는다. 바울은 이 대면을 아직 도달하지 않은 장면으로 설정하며 이 전제 위에서 은사는 여전히 교회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까지 남는다고 말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의 결론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함께 놓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 문장은 바울이 제시한 시간의 순서를 정리한다. 믿음과 소망은 아직 보지 못한 상태와 연결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굳건히 붙들고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바라본다. 바울이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과 소망은 대면 이전의 시간 속에서 기능한다.
이 말은 앞서 살핀 논증과 연결된다. 바울은 ‘지금’의 시간을 부분적으로 아는 단계로 설정하고 ‘그때’를 주님과의 대면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시간으로 설정한다. 믿음과 소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아직 대면의 위치에 이르지 않았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사랑은 다른 위치를 점유한다.
사랑은 대면 이전의 시간은 물론 대면 이후에도 영원히 지속된다. 바울이 사랑을 “제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지속성에 있다. 믿음과 소망이 최종 성취를 향해 나아갈 때에도, 사랑은 관계 그 자체로 영원히 남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은사의 위치가 드러난다. 은사는 믿음과 소망이 기능하는 시간 안에서 교회를 섬긴다. 아직 보지 못했기에 증언이 필요하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세움이 필요하다. 은사는 바로 이 ‘지금’의 시간 속에서 교회를 섬기는 역할을 수행한다.
은사의 시간표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은사의 변화를 하나의 시간 순서로 제시한다.
그 기준은 “온전한 것”이 오는 때이며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앞으로 도래할 지점으로 명확히 제시된다. 이 시간표 앞에서 남는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믿음과 소망이 여전히 기능한다는 사실은 교회가 아직 대면 이전의 시간에 서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전제 안에서 은사의 위치도 정리된다. 은사는 주님과의 대면 이전의 시간에 교회를 섬기는 선물이다. 바울은 은사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은사를 질서와 방향의 문제로 다룬다.
은사는 ‘지금’의 교회를 세우는 기능으로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은사는 종료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은사의 지속과 변화의 기준을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때로 고정한다. 그 장면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면 은사를 과거의 기능으로 돌려놓을 성경적 근거는 없다.
이제 다음 질문이 남는다. 이 시간표는 고린도전서에만 머무르는가, 아니면 성경 전체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가. 다음 글에서는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사역과 은사의 시간을 더 넓은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참고문헌
성경전서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12–14장
사도행전 2장
로마서 8장
에베소서 4장
B. B. Warfield, Counterfeit Miracles, Charles Scribner’s Sons, 1918.
Richard B. Gaffin Jr., Perspectives on Pentecost, P&R Publishing, 1979.
John MacArthur, Strange Fire, Thomas Nelson, 2013.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Hendrickson Publishers, 1994.
Sam Storms, Are Spiritual Gifts for Today?, Zondervan, 2018.
Craig S. Keener, Miracles, Baker Academic, 2011.
📖 은사종료설 시리즈 안내
- ▶ 은사는 종료되었는가: 은사종료설 ① | 요나의 신앙 저널 (현재 글)
- - 성령의 사역과 은사의 지속: 은사종료설 ② | 요나의 신앙 저널
- - 성경이 확정한 은사의 시간표: 은사종료설 ③ | 요나의 신앙 저널
요나의 신앙 저널 | yonafaith.tistory.com
※ 본 ‘요나의 시선’의 모든 글과 이미지는 무단 복제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성경의 권위와 해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경이 확정한 은사의 시간표: 은사종료설 ③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2.15 |
|---|---|
| 성령의 사역과 은사의 지속: 은사종료설 ②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2.14 |
| 사도행전 17장,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2.08 |
| 십일조는 폐하여졌는가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2.07 |
| 성경은 어떤 책인가 | 요나의 신앙 저널 (0) | 2025.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