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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십일조의 계명을 단 한 번도 변개하지 않았다. 말씀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길을 밝히셨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완전하여졌다

성경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말씀으로 증언한다.
이 말씀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대의 논란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에 따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드린다.
십일조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십일조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승리에서 드러난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고,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천지의 주재시니이다”(창 14:19)라고 선포하였다. 아브람은 이 말씀 앞에서 승리가 자신의 힘에서 난 것이 아님을 인정하며 십분의 일을 드렸다. 드리다(תְּרוּמָה, 테루마, 올려드림)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한다는 의미였다. 아브람의 드림은 규정 이전에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고백이었다.
야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십일조를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돌아오게 하실 때 그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고백하였다(창 28:22). 야곱의 서원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드린 응답이었다. 십일조는 인간의 제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신 은혜 앞에서 드러난 고백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한다는 이 첫 고백이 성경의 십일조를 여는 말씀의 중심이었다.
율법으로 주신 십일조
율법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말씀으로 세우셨다.
“땅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성물”(레 27:30)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성물(קֹדֶשׁ, 코데쉬, 거룩)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드리는 거룩한 구별이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드림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드림을 예배의 중심으로 세우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며 예배로 나아갔다.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셨다.
레위인은 땅의 기업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다”(민 18:21)는 말씀은 제사와 성막의 섬김이 계속되도록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였다. 공동체는 이 질서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며 섬김을 지켰다.
신명기는 십일조를 예배의 중심으로 더욱 분명하게 세운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드림을 올렸고, 이는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기준이었다.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드림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말씀의 길이 예배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드러난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드림의 중심을 밝히는 말씀의 원리였다.
예수님의 말씀, 십일조
예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삶을 말씀 안에서 바르게 세우셨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것은 드림의 중심을 잃은 마음이었다. 바리새인은 박하와 근채까지 구별하며 드렸으나 하나님께 향한 마음은 드러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마 23:23)고 말씀하시며 드림의 행위와 마음이 함께 세워져야 한다는 기준을 밝히셨다. 예수님은 드림의 중심을 다시 세우시며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을 분명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밝히신 공의(מִשְׁפָּט, 미쉬파트, 판단)는 정의로운 판단이며 십일조의 드림은 이 기준 위에서 드려져야 한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드림의 방향이었고, 믿음은 드림의 근거였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이 세 기준 안에 다시 놓아주심으로 드림의 본질을 밝히셨다. 형식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 중심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폐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드림의 본질을 다시 세우셨다.
성전세 사건에서도 예수님의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속한 아들이라 성전세에서 자유하셨으나,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 베드로에게 한 세겔을 드리게 하셨다(마 17:27). 이 행하심은 하나님께 드리는 질서를 존중하신 예수님의 뜻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원리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셨고 말씀과 행하심 모두 드림의 본질을 밝히는 기준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원리가 변하지 않았음을 밝히는 기준이 되었다.
신약시대 성도의 십일조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삶을 은혜 안에서 지켰다.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기쁨으로 드렸고 이 드림은 받은 은혜 앞에서 세워진 고백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 고백은 아브람과 야곱에게서 시작된 드림의 길이 초대교회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모습이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며 공동체를 세웠고 이 드림은 초대교회의 예배와 삶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드림의 기준을 명확하게 가르쳤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후 9:7)는 말씀에서 인색함(Λύπη, 뤼페, 마지못함)은 드림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켰다. 바울은 규정의 강도를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기쁨으로 드리는 드림의 중심을 밝히고자 하였다. 은혜로 받은 성도는 은혜로 드렸고 드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고백이었다.
신약 교회는 말씀의 사역자가 생계를 위해 염려하지 않도록 책임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바울은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며…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3–14)고 가르쳤다. 신약 교회의 드림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 앞에서 더욱 분명하게 세워졌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고백은 초대교회의 예배와 삶을 이끄는 중심이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기쁨으로 드렸고, 이 드림이 공동체를 세우는 힘이 되었다.

현대 교회의 십일조 논란
현대 교회에서 십일조는 자주 논란의 중심에 놓인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를 구약의 율법으로만 강조하고 어떤 이들은 이 십일조 드림을 부담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논란은 말씀보다 인간의 판단을 앞세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고 말씀하셨다. 도적질하다(גָּזַל, 가잘, 빼앗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기 소유로 돌리는 마음의 이탈을 드러낸다. 말라기의 경고는 규정을 넘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지 않는 마음에서 드러난 경고이다.
이사야 시대에도 백성들은 말씀보다 스스로 듣고 싶은 말을 앞세웠다.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말하며 옳은 것을 보지 말라 하고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사 30:10)고 요구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거부하였다. 성경은 이러한 마음이 시대마다 반복됨을 증언한다.
바울도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말씀을 떠나는 세대를 경계하였다. 듣기 좋은 말만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마음은 십일조 논란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보다 인간의 논리가 앞서면 드림의 본질은 믿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성경은 십일조를 부담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고백으로 증언하였고 예배의 중심에 두었다. 현대의 논란은 말씀의 중심을 잃을 때 생기지만 말씀 안에서는 논란이 힘을 잃는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은 어떤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말씀의 부르심이었다.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마 5:18)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이 시대와 판단을 넘어 계속 서 있다고 밝히셨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은 율법 이전에 이미 세워진 말씀의 기준이었고, 이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드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말씀의 변하지 않는 기준 위에서 세워진다.
아브람의 드림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 앞에서 세워진 고백이었다.
야곱의 서원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 앞에서 드린 응답이었다. 율법은 이 드림의 길을 공동체 안에 명확하게 세우기 위해 주어졌고, 예배와 섬김의 중심이 되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고백은 하나님의 거룩(קֹדֶשׁ, 코데쉬, 거룩)에 참여하는 드림이었다. 이 원리는 시대를 따라 계속 드러났고, 예수님도 이 길을 밝히셨다. 예수님은 드림의 중심을 공의(מִשְׁפָּט, 미쉬파트, 바른 판단)와 긍휼과 믿음 위에 다시 세우셨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드림의 중심이 무너진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마 23:23)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의 근본을 다시 밝히셨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림은 규정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는 고백으로 드러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신약 교회는 이 말씀을 은혜 안에서 지켰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기쁨으로 드렸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고백은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바울은 성도가 억지로 드리지 않고 기쁨으로 드리기를 가르쳤으며 이 가르침은 드림의 중심을 굳게 세우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초대교회는 받은 은혜에 따라 드림을 세웠고 이 고백이 공동체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하며 삶을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넘어 서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은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은 말씀의 중심에서 계속 이어졌다. 드림의 형태는 시대마다 달라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말씀의 일점 일획이 변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성도에게 주신 드림의 길을 다시 밝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은 성경 전부에 흐르는 말씀의 중심이었다.
아브람의 드림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인정하는 고백이었고 야곱의 서원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 앞에서 드러난 응답이었다. 율법은 이 고백을 예배 안에 세워 공동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도록 이끌었고 예수님은 드림의 중심을 공의와 긍휼과 믿음 안에서 다시 밝히셨다. 예수님께서 드림을 폐하지 않으시고 본질을 다시 세우신 말씀은 성도에게 변하지 않는 기준을 남겼다.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따라 드림을 지켰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교회를 세웠다.
드림은 은혜 앞에서 드리는 고백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삶이었다. 이 기준은 시대를 넘어 계속 드러났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은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성도는 말씀 앞에서 이 고백을 지켰다.
오늘 성도는 논란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이 정하신 드림의 기준을 흔들 수 없고 환경이 드림의 의미를 바꾸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부르심은 어떤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다.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며 하나님께 속한 삶을 세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정의고 공의다.
*본 글은 개역개정 성경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창세기 14장, 28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18장
신명기 12장, 14장
말라기 3장
마태복음 5장, 23장
고린도후서 9장
참고 문헌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대요리문답
-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 예배의 중심 원리 관련 조항.
* 키텔(Kittel), 『구약·신약 신학사전(ThD/TDNT)』 중 관련 원어 항목
קֹדֶשׁ(코데쉬, 거룩)
מִשְׁפָּט(미쉬파트, 판단)
גָּזַל(가잘, 빼앗다)
요나의 신앙 저널 | yonafaith.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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